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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

디카페인

 

 

 

 나에게 분노의 감정은 자체로서 무의미했기에 마지막으로 너를 마주한 날. 네 집을 나서고 나의 집으로 향하는 순간 이미 사라져있었다. 너에게 내가 화를 내거나 원망할 일이 전무하기는 했지. 감정의 옅어짐과 너를 향한 슬픔 또는 미련도 그러해서 나는 이따금 너를 잊고도 잘 지내왔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관성에 끌려 돌아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의 푸가>. 같은 저자의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을 언젠간 너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넌 내게 후에 책장에 꽂아두라고 말했었다. 다시 돌아와 <이별의 푸가>엔 너와 헤어지고 나서의 이야기가 적혀있어. 반복되는 푸가처럼. 너와의 이별이 계속 돌아온다. 철학자란 미련을 더 쓰는 사람인지. 나는 철학과 논술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다 쓰지 못했어. 만약 그때 완성하여 내가 철학과에 들어갔다고 한들 이 편지가 이뤄지지 않을 미래였을까. 나는 지금이든 그 어느 순간에서든 네게 똑같은 글을 쓰고 있었을거라 자신한다. 네가 나를 차례대로 차단하고, 문이 하나씩 닫히고 나서 나는 더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전에는 네게 할 수 없던 말을 많이 내뱉었어.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도 너는 어디에서라도 잘 지내고 있을거란 것도 이제 나는 이해한다. 과정으로서의 일상이라고 여기는 중이다. 그럼에도 나는 푸가처럼 다시 네게 문을 두들기고 있다. 앙금이 덜해져 있기를 바라며. 너는 꽤 유연한 사람이었어. 전에 네게 밝혔듯이 나는 곧 너의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처음 만난 때의 내년 그러니까 이제는 올해에 내가 독립을 할거란 걸 기억하는지.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홀로 서게 되겠지. 너와 가까웠을때 이 동네를 주욱 살피기는 했었어. 그래도 네가 있는 그 곳은 피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 우연으로든 뭐로든 만날 일이 생길거야. 정해진 미래라는 것이 있다. 운명같은 것들. 네가 나를 보고 피하지 않기를, 너의 그 하루를 내가 구부려 트리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네게 문을 두들긴다. 여러번 치여도. 나의 거의 모든 곳에 네가 묻어있더라. 그걸 나는 굳이 부정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걸 읽고있는 너는 나를 아직 이기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잘 그래왔듯이 보지 않은 것으로 해주기를. 나는 지금 내 작은 바람으로 펜을 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엮인 감정은 모두 씻기고 담백하게 대할 날이 있을거라 믿는다. 겨울을 잘 나고 이제는 따뜻한 볕이 들기 시작한다. 저녁의 빛이 조금씩 길어지는게 보여. 나는 변하지 않고 목련을 부탁해에서 드립커피를 마시는 중인데, 여기에는 디카페인 원두가 있잖아. 알고 있겠지만.

이 편지를 너에게 부칠 수는 있을까.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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