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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여름 끝자락, 산장에서


오전 7:00
먼길을 떠나는 오늘, 다행히 날이 좋다. 정동향인 거실로 오늘의 날씨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온몸으로 햇볕을 쐬고 나가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야한다. 그린하임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이곳에서 지낸지도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시간은 언제나 빠르고, 이제는 혼자 지내는 것도 익숙해졌다. 나는 자유롭기도 하고 그만큼 외롭기도 하다. 눈을 뜨고 문을 열면 멀리 보이는 저 산이 좋다. 그게 보이는 날은 비교적 내 기분도 뚜렷하다.


8월 말. 녹음이 짙은, 아직은 여름. 그래도 저번 주에 비해서 한낮 온도가 10도가량 낮아졌고 이제 땀을 흘리지 않는다. 습도도 부쩍 내려가 가을 날씨를 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림자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아름답다.


전주를 떠난다.

 


마지막 남은 여름과 조금씩 보이는 공활한 가을 하늘. 그 아래 다소 늦어지는 고속버스. 난 예상보다 한시간 가량 늦는다.


이번 모임은 워커힐 더글라스 하우스에서 한다. 우리는 세 달간 열심히 돈을 모았다. 100일 치 꿈인 셈이다. 나는 먼저 도착해서 친구들을 맞이하는 꿈을 꿔왔지만 늘 돌발상황이란 일어난다. 늦게 서울에 도착해 조급해진 나는 워커힐로 도착 후 셔틀을 포기하고 캐리어를 들고 걸어가기로 한다. -더글라스 하우스는 워커힐 본관에서 더 안쪽으로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다행히 주차타워 위쪽에 이정표가 크게 쓰여있었다.


이 안에는 너희들이 있다.
사실 만나기 전에 나만 조급했던 것은 아니다. 지혜는 카드를 두고 와서 다시 집에 다녀왔고, 지은이는 밝은 색 바지에 묻은 얼룩을 지우려다 바지 주름이 사라졌다.
머피의 법칙? "오늘 우리 다 왜 이러냐"라고 한탄했지만, 머피의 법칙은 그렇게 될 일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리. 모여서 더 웃기 위해 그전에 불행이 먼저 왔다.

 

 


라운지에서 아이스 라테를 한잔 먼저 마셨다. 아니 사실 두잔 마셨다.
공짜 커피는 언제나 맛있다. 더글라스 하우스는 폴 바셋의 머신을 사용한다.


지혜(aka 오사마)는 커피를 포크로 찍어먹는 취미가 생겼다고 했다. (포크를 머들러 삼아 라떼를 젓는 지혜)


그리고 객실로 도착. 워커힐 트래디셔널 스위트. 이름처럼 온돌 마룻바닥이 있고, 조절이 가능하다.

 


커다란 킹 침대와 좌식 테이블, 우드톤의 티볼리 라디오가 나오는 스피커. 까치가 위에 앉아있고, 우리는 비로소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테이블 쪽 중문을 치고 담요를 펼치고 잘 계획이다.



철저한 셋은 코로나 자가검사를 한 후 모임을 시작한다. 도덕적 의무와 개인위생, 사회적 일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전염병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음성을 확인하고 버렸는데, 휴지통 안에서 한개가 두줄로 바뀌는거 아니냐고 우스개소리했다.

더글라스 하우스의 어메니티가 동구밭의 비누 제품으로 모두 바뀐 것에 착안해, 동구밭에서 비누 만들기 세트를 사서 갔었다.
각각 다른 귀여운 피규어가 하나씩 있고 그걸 안에 넣어서 만드는 DIY인데, 아쉽게도 종이컵이 없어서 만들지 못했다.

 

 

우리는 종이컵을 찾아서 잠깐 호텔 경내를 나섰다. 결국 종이컵은 찾지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
다시 객실로 돌아가기로 한다. 충분히 노력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미련 없이 포기한다. 이것은 도약의 부분이기도하다.
본관에 있는 르 파사쥬에서는 빵과 피자, 와인과 맥주를 판매하는데 워커힐에서 맥주가 세 종류 나오기 시작했다.
첫인사와 꿈결, 그리고 머무름. 맥주를 좋아하는 우리는 눈여겨 보았다. 더글라스 라운지에서 맛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새로운 물건을 사지는 않고, 집에 있는 새 물건을 골라서 랜덤으로 서로에게 준다.
나는 집에 있는 샤넬 파우치와 장바구니 파우치, 지혜는 에코스토어의 고급 디시워셔, 지은이는 사론파스 140매를 준비해왔다.
종이에 서로의 성을 적어 나누었는데 저번 겨울처럼 내가 지은이 것을, 지혜가 내 것을, 지은이가 지혜 것을 받았다.
서로 잘 쓸 물건을 제대로 받았다고 서로에게 감사한다.

 

 


더글라스 하우스의 자랑. 라이브러리.
최인아 책방의 큐레이션으로 대여섯 개의 주제를 가진 섹션과 그에 따른 좋은 책들이 놓여있다.
계절을 즐기기 위해서 나는 바쇼의 하이쿠를, 지혜는 일본 인테리어 책을, 지은이는 마스다 미리의 주말은 숲으로를 집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모두가 일본에 관한 책을 들고 있다고 지혜가 말했고, 우리는 그 그리움을 수긍했다.
일본에서 시작한 우리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이따금 만나서 그 시절을 추억한다.
잊을 수 없는 환상 같은 것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나는 계절감을 느끼게 하고 싶어 지혜에게 하이쿠를 건넨다. 하이쿠는 짧아서 읽기 좋고, 계절어가 들어있기 때문에 환절기에 읽기 좋다.
우리는 사실 네 명의 무리이다. 한 명은 일본에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은 셋이다. 공교롭게 오사카의 같은 맨션의 한 층에서 만나 친해졌었다.


우리가 묵는 객실은 문을 열면 초록색 숲이 보인다.

 


오후 5시즈음 노을을 맞으며 우리는 루미큐브를 한다. 지혜는 어쩌면 저런 패를 갖고있을까. 이번 게임에서 나는 처음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주 재미있는 머리 싸움. 지혜는 조커를 들고 있으면서도 누가 갖고있냐고 말했다.
그러다 훌쩍 6시가 되고 술과 간단한 안주를 곁들일 수 있는 더글라스 아워가 시작한다.


잠봉뵈르나 앙버터를 만들 수 있는 바게트가 있다.


햄, 과일, 나쵸, 푸실리 등 간단하지만 충분히 요기할만한 것들로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낸다.

 


머무름과 꿈결. 여기에 머물며 꿈결같은 시간을 보내라는 뜻일까? 꽃과 잎의 색이 단조로웠다.


함께하는 셋의 밤이 저물고 있다.


실컷 떠들고 산책겸, 야경을 보러 나가기로 한다.
우리가 선택한 패키지에 피자힐의 콰트로 피자를 주문할 수 있어서 함께 받아오기로 한다.

 

 

 


강 건너서 빌딩들이 보이는게 꼭 오사카에서 우리가 살던 곳이랑 비슷했다.


둔치에 나가면 요도가와(강)를 사이에 두고 우메다가 보여서 곧잘 산책하고는 했다. 저기는 지금 또 어떻게 바뀌었으려나.

 


먹고 먹는 시간. 그러다 잠이 들었다.


새벽부터 이슬비가 내린다.
제일 먼저 나갈 채비를 하고 조식을 먹자고 보챘다.




어제와 같은 라운지에서의 조식.
지은이는 잠이 더 고팠는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저녁보다 늘어난 먹을것과 싱그러운 과일을 포기하다니 너무 안타깝잖아. 싱그러운 과일을 먹이자.
지은이에게 세명이 오지 않으면 입장을 시켜 주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며 오게 했다.


가벼운 계절과일과 싱그러운 쥬스, 유제품으로 요기하는 여유로운 아침식사. 다들 반쯤 눈이 감긴채 있는 모습. 여유와 게으름은 엇비슷하다. 세상에는 같은 모습을 두고 달리 이야기하는 것들 투성이다. 인식과 마음가짐의 차이.


비 내리는 아침의 게으름.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시간



우리는 다시 모이기로 하고
나는 다른 일정으로 먼저 떠난다.

 

 


산장에서의 늦여름을 마치고 우리는 가을로 향한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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